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문단 편집) === 전간기 ===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인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열린 육군의 어떤 기동 훈련에서 그는 훈련 [[연대장]]을 맡았는데, 훈련 평가관은 그에 대해 "결단력이 부족하고 우유부단함"이라고 기록했다. 이런 평가에서 보이듯이 그는 야전 지휘관 타입은 아니었고, 이후에도 주로 참모장교로 근무하며 자신의 장점을 발휘했다. 장군참모 출신 엘리트 장교들은 다양한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해 여러 병과를 돌리는 게 정상인데, 파울루스를 특히 아낀 상관인 [[프란츠 할더]] 역시 일선 [[중대장]] 경험조차 없는 참모장교였고, 할더가 육군최고사령관에 취임하면서 자신의 인맥에 속한 장교들을 적극 등용했다. 이렇게 실전 경험이 부족한 장교들이 주축을 이룬 참모본부는 2차 대전 개전 후 야전 지휘관들과 자주 충돌을 빚게 된다. 하지만 파울루스는 자신의 상관이었던 [[하인츠 구데리안]], 초창기 [[베를린]] 참모본부(병무국)에서 함께 근무하면서 서로의 집에도 놀러다닐 만큼 절친했던 [[발터 모델]]과 개전 후에도 친분을 유지하였고, 할더가 이들과 갈등을 빚을 때마다 원만하게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파울루스의 아들이 제3기갑사단에 근무할 당시 [[사단장]]이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발터 모델이었는데, 이때 젊은 파울루스 중위와 그의 동료들에 따르면 "롬멜이나 모델 장군과 비교하면 파울루스 장군은 군인보다는 조용한 학자를 연상시켰다."고 한다. 기존 항목에서는 귀족 출신이 아닌 평민 출신 장교가 오히려 히틀러 집권 하에서 승진이 유리했다고 하나 실제로는 이러한 이분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일찌감치 [[나치당]]이나 히틀러와 친분을 쌓은 장군참모 출신이 아닌 [[에르빈 롬멜]]과 [[페르디난트 쇠르너]]가 독보적인 예외일 뿐. 이름에 [[폰]](Von) 이 없더라도 전통적인 군인 가문 출신 장교[* [[헤르만 호트]], [[하인츠 구데리안]], 한스발렌틴 후베, 헤르만 발크, 발터 벵크, 지크프리트 베스트팔, 이름만 봐선 평민 같지만 아버지가 군 장교인 군인 가문 출신 장성이다.]들은 군부 내 후견인이 장교의 임관, 진급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독일 육군 진급 체계에 여전히 유리했다.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육군을 장악하려 한 [[블롬베르크-프뤼치 사건]]에서 파울루스는 프란츠 할더 라인이어서 숙청을 피해갔지만, 정작 같은 평민 출신의 발터 모델은 자신의 추천인인 [[루트비히 베크]]가 사임하자 즉시 [[야전군]]으로 좌천되었다. 이 때 모델과 함께 야전군으로 좌천된 인물이 [[프로이센]] 귀족 출신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 정작 모델은 [[폴란드 침공]], 만슈타인은 [[프랑스 침공]]에서 실전 경험을 쌓으면서 이후 진급에 유리해졌다.] 히틀러는 이때만 해도 자신의 뜻대로 [[발터 폰 라이헤나우]]를 육군 총사령관에 세우는 것조차 실패할 정도였다. 히틀러와 나치당이 본격적으로 육군 인사를 좌지우지한 것은 암살자 그룹에 대한 숙청이 시작된 1943, 44년 이후의 일이다. 파울루스는 정치색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현 정권에 이의 없이 충성하는 보통의 독일군 장교였다면 그의 아내인 엘레나 콘스탄체는 처음부터 히틀러와 나치당의 정책을 불신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